살루스티우스(C. Sallustius Crispus) 카틸리나 전쟁기(Bellum Catilinae) 16~18 라틴고전집


[XVI] 1 Sed iuventutem, quam, ut supra diximus, illexerat, multis modis mala facinora edocebat. 2 Ex illis testis signatoresque falsos commodare; fidem, fortunas, pericula vilia habere, post, ubi eorum famam atque pudorem attriverat, maiora alia imperabat. 3 Si causa peccandi in praesens minus suppetebat, nihilo minus insontis sicuti sontis circumvenire, iugulare: scilicet, ne per otium torpescerent manus aut animus, gratuito potius malus atque crudelis erat. 4 His amicis sociisque confisus Catilina, simul quod aes alienum per omnis terras ingens erat et quod plerique Sullani milites largius suo usi rapinarum et victoriae veteris memores civile bellum exoptabant, opprimundae rei publicae consilium cepit. 5 In Italia nullus exercitus, Cn. Pompeius in extremis terris bellum gerebat; ipsi consulatum petenti magna spes, senatus nihil sane intentus: tutae tranquillaeque res omnes, sed ea prorsus opportuna Catilinae.

[XVI] 1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 카틸리나는 젊은이들에게 여러 방식으로 나쁜 범죄들을 가르쳤다. 2 그들에게 위증자들과 화폐 위조범들을 보내주었고 신의와 행운과 위험을 가볍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그들의 명성과 영예가 쇠약해지자 다른 더 큰 것을 요구했다. 3 누군가가 죄를 지을 수 없거나 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죄가 있는 것처럼 에워싸고 목을 잘랐다. 할일이 없이 빈둥거리다가 육체와 정신이 무기력하게 되기 보다는 일부러라도 사악하고 잔인하게 되는 쪽을 선호했다. 4 이들을 자신의 친구들이자 동료로 굳게 믿은 카틸리나는 전 세계에 걸친 자신의 채무가 막대하였고 많은 숫자의 술라의 예전 병사들이 그들의 재산을 탕진하고 지나간 내전에서의 약탈과 승리의 기억을 재현하고 싶어했으므로 국가를 전복할 계획에 착수하였다. 5 이탈리아에는 어떠한 군대도 없었고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는 당시 땅 끝까지 가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1. 카틸리나 자신은 집정관이 되려는 큰 희망을 갖고 있었지만, 원로원은 전혀 달가워하지 않았다2. 로마는 모든 면에서 조용한 것처럼 보였지만3, 이는 그야말로 카틸리나에게 기회가 되었다.

1. 폼페이우스는 BC 67년의 가비니우스 법에 의한 킬리키아(소아시아)의 해적소탕전과 BC 66의 마닐리우스 법에 의한 폰투스 왕국(터키 아나톨리아)의 미트라다테스 왕과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2. 카틸리나는 BC 65년 겨울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으나 속주민 대표단이 그를 권력남용으로 원로원에 기소하여 재판에 회부되는 바람에 후보 자격을 상실했다. 그에 대한 불만으로 음모를 꾀했으나 실패하고(제1차 카틸리나 모반 사건) 그뒤에도 여러 차례 집정관을 노렸으나 부채 전액 탕감 등 급진적 공약을 두려워한 원로원의 방해로 번번히 실패한다.
3. 카틸리나의 무장 봉기가 일어나기 직전인 BC 64년에는 카틸리나를 지속적으로 견제하는 키케로와 크라수스의 지원을 받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집정관에 당선되는 사건 외에는 로마 국내에서는 별다른 정치적 격변 없이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다.

[XVII] 1 Igitur circiter Kalendas Iunias L. Caesare et C. Figulo consulibus primo singulos appellare, hortari alios, alios temptare; opes suas, inparatum rem publicam, magna praemia coniurationis docere. 2 Ubi satis explorata sunt, quae voluit, in unum omnis convocat, quibus maxuma necessitudo et plurumum audaciae inerat. 3 Eo convenere senatorii ordinis P. Lentulus Sura, P. Autronius, L. Cassius Longinus, C. Cethegus, P. et Ser. Sullae Ser. filii, L. Vargunteius, Q. Annius, M. Porcius Laeca, L. Bestia, Q. Curius; 4 praeterea ex equestri ordine M. Fulvius Nobilior, L. Statilius, P. Gabinius Capito, C. Cornelius; ad hoc multi ex coloniis et municipiis domi nobiles. 5 Erant praeterea complures paulo occultius consili huiusce participes nobiles, quos magis dominationis spes hortabatur quam inopia aut alia necessitudo. 6 Ceterum iuventus pleraque, sed maxume nobilium, Catilinae inceptis favebat; quibus in otio vel magnifice vel molliter vivere copia erat, incerta pro certis, bellum quam pacem malebant. 7 Fuere item ea tempestate, qui crederent M. Licinium Crassum non ignarum eius consili fuisse; quia Cn. Pompeius, invisus ipsi, magnum exercitum ductabat, cuiusvis opes voluisse contra illius potentiam crescere, simul confisum, si coniuratio valuisset, facile apud illos principem se fore.

[XVII] 1 그래서 루키우스 카이사르(L. Iulius Caesar)1와 가이우스 피굴루스(C. Figulus)가 집정관이던 BC 64년 6월 1일경에 카틸리나는 처음으로 그들을 한 사람씩 불렀다. 카틸리나는 어떤 사람들은 격려하고 어떤 사람들은 의중을 떠보았다. 그는 그들에게 자신들의 재정 규모와 국가의 무방비 상태와 음모가 성공하면 얻게될 막대한 보상에 대해 알려주었다. 2 원하는 만큼 충분한 탐색을 끝내자 그는 크나큰 필요성을 느끼는 자들과 대단히 무모한 일에 빠져들 자들을 모두 한 군데로 불러 모았다. 3 모인 자들 가운데에서 집정관급 인사들로는 푸블리우스 렌툴루스 수라(P. Lentulus Sura)2 푸블리우스 아우트로니우스(P. Autronius) 루키우스 캇시우스 롱기누스(L. Cassius Longinus) 가이우스 케테구스(C. Cethegus) 세르비우스의 아들들인 푸블리우스 술라(P. Sulla)와 세르비우스 술라(Ser. Sulla)3 루키우스 바르군테이우스(L. Vargunteius) 퀸투스 안니우스(Q. Annius)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라이카(M. Porcius Laeca) 루키우스 베스티아(L. Bestia) 퀸투스 쿠리우스(Q. Curius)가 있었다. 4 그밖에 기사 계급으로는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M. Fulvius Nobilior) 루키우스 스타틸리우스(L. Statilius) 푸블리우스 가비니우스 카피토(P. Gabinius Capito)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C. Cornelius)가 참여했다. 이외에 식민도시들 및 자치도시들에서 다수의 귀족들이 모였다. 5 그밖에도 보다 은밀하게 계획에 참여한 귀족들도 있었다. 이들은 가난하거나 필요해서라기보다는 지배하려는 희망에 더욱 고무되었다. 6 그들보다 훨씬 수가 많고 더욱 가문이 화려한 젊은이들도 카틸리나의 계획에 사로잡혀 호의를 보였다. 이들은 한가하고 호화롭고 평온하게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확실함보다는 불확실함을 평화보다는 전쟁을 선택했던 것이다. 7 또한 당시에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랏수스 역시 모반 계획을 모르지 않았을 것으로 믿어졌다. 크랏수스가 질시하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대군을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힘에 대항하는 어떠한 세력이라도 크랏수스는 지원하길 원했을 것이며 만약 음모가 성공하게 되었다면 크랏수스가 쉽게 그들의 지도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믿어졌다.

1. 루키우스 카이사르(L. Iulius Caesar)는 독재관 카이사르의 친척으로 BC 64년의 집정관이며 제2차 카틸리나 모반사건 실패 후 원로원 논의에서는 카틸리나의 사형에 투표하였다. 푸블리우스 렌툴루스 수라와는 동서지간으로 카이사르 내전기에는 카이사르 당파였다. 2차 삼두정치 시기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반대파로서 사형 당할 위기에 몰리기도 했으나 여동생의 구원으로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의 아들은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에 폼페이우스 편에 서서 싸우다가 살해당했다.
2. 푸블리우스 렌툴루스 수라(P. Lentulus Sura)는 BC 71년 집정관으로 루키우스 카이사르와 동서간이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계부다. BC 70년 부패 혐의로 원로원에서 추방되고 나서 카틸리나 당파에 가담했다가 키케로에 의해 탄핵당하여 죽었다. 안토니우스가 키케로를 증오하여 죽였던 중요한 이유가 계부의 죽음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3. 푸블리우스와 세르비우스는 친형제로서 독재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친조카들이다. 푸블리우스 술라는 카틸리나 사후 모반 연루 혐의로 재판을 받았으나 키케로와 호르텐시우스가 열렬히 변호한 덕분에 간신히 살아남았다. 카이사르 내전 시기에는 카이사르의 부장으로 활약하기도 하였으며 파르살로스 회전에서는 우익을 맡아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가 이끄는 폼페이우스 군과 싸웠다. 그러나 동생 세르비우스는 키케로가 변호를 거부하여 살해당했다.

[XVIII] 1 Sed antea item coniuravere pauci contra rem publicam, in quibus Catilina fuit. 2 De qua, quam verissume potero, dicam. L. Tullo et M’18. Lepido consulibus P. Autronius et P. Sulla designati consules legibus ambitus interrogati poenas dederant. 3 Post paulo Catilina pecuniarum repetundarum reus prohibitus erat consulatum petere, quod intra legitumos dies profiteri nequiverat. 4 Erat eodem tempore Cn. Piso, adulescens nobilis, summae audaciae, egens, factiosus, quem ad perturbandam rem publicam inopia atque mali mores stimulabant. 5 Cum hoc Catilina et Autronius circiter Nonas Decembris consilio communicato parabant in Capitolio Kalendis Ianuariis L. Cottam et L. Torquatum consules interficere, ipsi fascibus correptis Pisonem cum exercitu ad obtinendas duas Hispanias mittere. 6 Ea re cognita rursus in Nonas Februarias consilium caedis transtulerant. 7 Iam tum non consulibus modo, sed plerisque senatoribus perniciem machinabantur. 8 Quod ni Catilina maturasset pro curia signum sociis dare, eo die post conditam urbem Romam pessumum facinus patratum foret. Quia nondum frequentes armati convenerant, ea res consilium diremit.

[XVIII] 1 그러나 카틸리나 음모 이전에도 국가에 대항하는 작은 음모가 있었다. 2 이에 대하여 나는 가능한 진실되게 말하겠다. 루키우스 툴리우스(L. Tullius)와 마니우스 레피두스(M’. Lepidus)가 집정관일 때(BC 66년) 차기 집정관으로 당선된 푸블리우스 아우트로니우스와 푸블리우스 술라가 선거부정 혐의로 기소당하여 법에 의해 처벌되었다. 3 얼마 후에는 카틸리나가 공금 횡령 혐의로 피소 되고 집정관직 입후보가 금지되어 법정기한 내에 출마할 수 없게 됐다. 4 같은 시기에 젊은 귀족이자 매우 사납고 가난하며 파벌을 좋아하는 그나이우스 피소는 국가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하여 빈곤과 잘못된 관행들을 자극했다1. 5 12월 5일경에 피소와 함께 카틸리나 및 아우트로니우스는 BC 65년 1월 1일에 집정관 루키우스 콧타와 루키우스 토르콰투스를 죽이고 자신들은 파스케스를 쥐고2 피소를 군대와 함께 보내 두 개의 히스파니아 속주3를 장악하려는 세부적인 계획을 준비하였다4. 6 그렇지만 이런 계획이 드러나자 그들은 살해 계획을 2월 5일로 옮겼다. 7 그때 이미 그들은 집정관들뿐만 아니라 여러 원로원 의원들도 죽일 계획이었다. 8 만약 카틸리나가 원로원 회의장 안에서 동료들에게 신호를 주는 것을 서두르지 않았더라면5 그날 도시 로마가 창건된 이래로 최악의 사건이 벌어졌을 것이다. 무장한 이들이 많이 모여들지 않아서 카틸리나는 그 계획을 거두어 들였던 것이다.

1. 크라쿠스 형제의 농지개혁 사례처럼 전통적으로 로마의 민중정치가들은 국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빈곤 계층들을 선동할 뿐 아니라 때로는 로마의 국력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빈민구제 정책을 내어놓기도 하는데 이는 잘못된 관행이다.
2. 파스케스를 쥐어(fascibus correptis)→파스케스(fasces)는 자작나무 가지를 붉은 가죽끈을 사용해 X자로 묶은 것으로 원래 에트루리아 왕권의 상징이었으나, 신생국 로마에 전해져 공화정은 물론 제정 말기까지 임페리움(지휘권)의 상징이 되었다. 도끼를 넣은 파스케스는 신성경계선(pomerium) 밖에서의 사형의 권한까지 있음을 상징한다. 파스케스를 쥔다는 것은 임페리움을 가진다는 의미다.
3. 오늘날의 안달루시아와 포르투갈에 해당하는 저쪽 히스파니아(Hispania Ulterior)와 카탈루냐와 남부 카스티야 지방에 해당하는 이쪽 히스파니아(Hispania Citerior)를 의미한다.
4. 지금 18장에서 설명하는 것이 미수로 끝난 제1차 카틸리나 모반 사건이다.
5. 계획했던 무장 인원이 모이지 않아 카틸리나가 거사 포기의 신호를 보냈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