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을 지우고 나서야 양심의 의미를 알았다 인물비평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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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8일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기일이라고 기억하지 않고 살았다. 김대중을 추모한다는 어떤 글을 보고 나서야 “그렇지. 이맘때 아주 더운 날 죽었지”라는 생각이 떠올랐고 구글링을 하고 나서야 2009년 8월 18일이라는 날짜를 알았다. 오래 지나면 부모님의 기일조차 가끔 더듬는 불효자식인데, 아무리 대통령이라고 한들 남의 사망 날짜를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직도 그를 민주화 투사니 행동하는 양심이라며 떠받드는 사람이 많은 데 비해 너무도 조용한 분위기가 왠지 낯설기만 하다. 국장이라고 땡볕더위에 고생한 사람들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1971년 초봄, 좀처럼 정치인 볼 기회가 없던 탄광촌을 단지 인구가 많다는 이유로 스쳐 지나가던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을 우연히 보게 되었고, 길에 뿌려진 사진을 줍게 되었다. 시골 촌놈에게 마주 쳐다볼 수도 없다는 눈부신 외모와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안광은 소년의 우상이 되어버렸다. 가난 때문에 고등학교도 포기했던 소년은 어머니를 졸라 회색 표지 양장본의 ‘내가 걷는 七十年代’와 갈색 표지의 ‘대중경제론’을 사서 신주처럼 모시고 읽었다. 급기야 그의 사진을 창호지 문에 대고 확대된 초상화를 그려 액자로 걸어놓고 흐뭇한 마음에 보고 또 보았다.

얼마 뒤, 그를 다시 보는 기회는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누나를 보러온 하숙 하던 여선생님의 동생(연세대생)이 서울 구경을 시켜준다기에 따라 올라갔다. 신당동 어느 골목, 냄새 나는 하숙집은 나를 실망시켰다. 외삼촌이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드린다던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고 본집도 당시엔 돈 많이 번다던 국영 광업소장이라는 게 거짓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밤중에 대변이 급해 더듬어 간 원시적 화장실에서 미끄러져 옷을 버리고 나선 차라리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쨌든 날이 밝아 형(연세대생)이 학교 간 사이에 마음대로 서울거리를 쏘다니게 되었다.

돈이 넉넉지 않아 걸어서 동대문을 보았고, 고교야구 시합으로 떠들썩한 야구장도 처음 보았고, 보는 데도 층수에 따라 돈을 내야 한다는 거짓말을 확인하면서 삼일빌딩도 처음 보게 되었다. 사흘째 되던 날인가 신당동에서 야구장 쪽으로 오는데 그야말로 인산인해 엄청난 사람들이 한쪽 방향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무작정 사람들이 걸어가는 방향으로 따라갔다. 장충체육관이라는 커다란 글씨의 둥근 지붕이 보이는 데서는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촌놈에게 입이 딱 벌어지는 엄청난 인파였다. 김대중 후보의 장충단 유세가 벌어지고 있었다.

어머니가 걱정하시는 걸 뻔히 알면서도, 형(연세대생)의 그만 가주었으면 하는 눈치도 모른 채하고 일주일을 더 버티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유세도 보게 되었다. 연단은 김대중씨가 유세하던 반대방향이었으므로 신라호텔 쪽 언덕에서 내려다 보았다. 사방에서 똑같은 모자를 쓴 여러 무리의 사람들이 떼로 움직이고 있었다. 많은 인원이 트럭으로 조직적으로 동원되고 있었다. 그래도 인파는 김대중씨 유세보다도 적었다. 역시 나의 영웅이자 우상은 달랐다. 이제 그에 대한 짝사랑은 광적으로 변했다. 그에 관한 자료는 구할 수 있는 데까지 구하기 시작했다.

서울 바람이 들어 금방 가출을 했다. 그에 대한 짝사랑은 서울, 부산, 울산을 전전하면서도 계속되었다. 5월엔 8대 총선거가 있었다. 그의 지원유세가 있는 곳이면 어디나 쫓아다녔다. 불광 국민학교, 울산 학성 국민학교, 최형우씨를 유망한 정치인으로서 소개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오죽하면 덥수룩한 까까머리가 나도 모르게 사진에 찍혀 신민당 선거 팜플렛에 등장할 정도였다. 몇 년 뒤엔 수영만 매립지에도 가보았고 늦은 나이에 대학생이 되어 대구 종합운동장의 험악한 선거유세에서도 그를 보았다. 어머니가 위암으로 입원해 있던 화정 명지병원에서도 눈치 없이 대통령 후보 김대중을 응원해서 지금도 종종 아내에게 구박을 당하곤 한다.

그러던 그를 지웠다. 아주 완전히 지웠다. 지우고 나서야 ‘행동하는 양심’이란 가면 속에 갇혀 있던 양심의 참다운 의미를 알게 되었다. 언제 무슨 책인지 정확한 기억은 없다. 어느 날 김대중이 박정권의 살해음모라고 선전해왔던 1971년 교통사고 진상에 관한 글을 읽게 되었다. 어리석고 광적이었던 젊은 날의 짝사랑이 부끄러웠다. 정말 수치스러웠다. 그냥 단순한 교통사고였다. 그것도 김대중을 태우고 가던 운전사의 추월을 허용치 않으려던 욕심 때문에 벌어진 교통사고였다. 김대중은 그걸 죽을 때까지 이용했고, 사후 공개된 일기에서도 음모라고 쓰고 죽었다. S0B, 시골집에 있던 ‘내가 걷는 七十年代’ 등 모든 수집물을 찢어 고물상에 넘겨버렸다. 어설픈 호기심 정치꾼이 새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김대중 교통사고에 대해서는 따로 포스팅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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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채널 2nd™ 2015/08/21 00:52 #

    ((김대중이는 아마도 그가 죽은 날을 사람들이 잘 기억하지 못할 -- 안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김대중이는 그 뻔뻔함에 ㅠㅠ <-- 하긴 뭐 노무현이도 "그라믄 내 마누라를 내삐리란 말입니꺼~" ㅋㅋㅋ

    어렸을 적에 김대중이가 쩔뚝거리는 모습을 보고 ... 이건 100 % 박정희가 깜빵에 쳐 넣어서 생긴 고문의 후유증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는데 ㅋㅋㅋ ((병신..)) 이 글에서와 같이 누군가의 글 :; 김대중이가 왜 쩔뚝거리게 되었는가라는 글을 읽고는 ... 그냥 김대중이 따위 기억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졌습니다.
  • 혜성같은 얼음의신 2015/08/21 11:21 #

    귀중한 회고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 Mediocris 2015/08/21 13:19 #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ddd 2015/08/21 13:24 # 삭제

    쌀로 핵
  • 착한마녀 2015/08/21 19:26 #

    헉...경험담이신가요. 아이고. 저희 집안에도 김대중 선생님에게 빠져서 집안 어른들 속썩인 인물이 한 분 계셨죠. 한 재산 다 가져다 바치신 ^^ㅋ
  • Mediocris 2015/08/21 20:37 #

    본글에 적은 바와 같이 한때 깊이 빠지긴 했지만, 재산을 가져다 바칠 정도로 어리석진 않았습니다.
  • 착한마녀 2015/08/22 14:47 #

    흠...피가 물보다 진해서 하는 말이 아니구요 ^^; 전 그 분조차도 어리석다고는 생각안해요. 단지 약지 않아서, 계산적이지 못해서 그랬겠죠. 속는 사람이 븅신이라는 말을 저는 싫어해요. 그건 속이는 사람들의 자기합리화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리석다'고 딱 잘라 표현하시다니 뭐랄까 깊은 반감...빡침이 느껴지네요. 지지자들이 돌아서면 무섭게 돌아선다더니 그런 상태이신가봐요.
  • Mediocris 2015/08/22 15:25 #

    '어리석다'는 표현이 언급하신 당사자를 향한 말로 들렸다면 죄송합니다. "재산을 가져다 바치지 않을 정도로 계산적이고 약았을 뿐입니다"라는 표현으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김대중이 아무리 속이더라도 계산적이고 약은 저를 이기진 못햇을 겁니다. '무섭게'라는 표현이 무조건적 반발을 의미한다면 무섭게 돌아선 지지자야말로 어리석은 자입니다. 사실에 근거한 철저한 비판, 그러므로 무섭지 않은 비판자임을 증명하겠습니다.
  • 착한마녀 2015/08/22 16:36 #

    죄송하실 건 없구요. 솔직히 오프라인에서는 해리포터의 볼트모트처럼 금기시되는 그 이름이잖아요. 표현이 좀 그런가 ^^;; 비판할 수 있다는 용기가 그저 존경스러워요. 남들이 모르는 정보가 '무서움'의 근원이죠. 보통의 사람은 멀리서 대충 보고듣는 걸 통해서 '나빴다' 혹은 아니다로 직감하지만. 자세한 실체를 모르니 조목조목 반박은 어려운...저도 그런 팩트를 기대하겠습니다~
  • 백범 2015/08/22 21:37 #

    속는 놈이 븅신인가, 그 애비가 븅신이지...

    자식들에게 생존방법, 살아남는 방법 또한 못가르치는게 무슨 애비인가요?

    제가 자식들에게 제사 지내지 마라, 나 죽거든 제사 없애라 라고 하는게 그때문입니다. 딸이야 네가 시집을 가면 그 집안 풍경 때문에 어쩔수 없으니 너는 그냥 입다물고 있으라고 하지만 아들에게 만큼은 제사 없애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아이들에게 범죄 피해자, 피해의식 있는 사람, 게이, 트랜스젠더, 레즈비언 집에 들이지 말라는 말도 꼭 하고 있는데... 피해의식을 가진 인간은 괴물입니다. 진짜 피해자든 피해자가 아니든, 피해의식을 가진 인간은 분란과 피를 부르는 칼망나니일 뿐이죠.
  • 2015/08/22 21:34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5/08/22 22:11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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