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집권, 꿈깨시오 정치경제집

대학 기숙사 후문 앞 구멍가게에는 많은 학생들이 치약, 칫솔, 비누 같은 소소한 일상용품이나 소주, 오징어, 과자, 라면 등을 사기 위해 드나 들었다. 기숙사 근처에 하나뿐인 가게는 규모가 작기도 했지만 출입구가 좁았다. 한꺼번에 두 사람이 드나들기도 힘들어 한 사람은 비스듬히 비켜서야 했는데 출입구 왼쪽에 놓인 아이스크림용 냉장고가 가뜩이나 좁은 출입구를 더욱 좁게 만들었다. 어느 날 저녁, 과자를 사려고 아이스크림 냉장고 근처의 진열대를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묘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신경이 무딘 편이었지만, 아무래도 느낌이 께름칙했다. 가게 안쪽을 둘러보았으나 소리가 날만한 것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고 과자 고르기를 계속하려는데 진열대 맨 아래 선반이 수상했다. 발 밑에 눈길을 주자, 세상에, 내 둔중한 구둣발이 새끼고양이를 밟고 있는 게 아닌가? 그랬다. 며칠 전부터 귀여운 새끼고양이 몇 마리가 가게 주위를 아장거리며 돌아다니는 걸 본 적 있었는데, 그 중 한 마리가 내 발에 밟힌 것이었다. 순간 섬뜩한 느낌이 전기처럼 짜릿하게 내 몸을 스쳐갔다. 진열대 위쪽을 살피느라 까치발로 디뎠는데 얼마나 아팠을까? 영물이라더니 새끼고양이는 발에 밟히고도 처음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참지 못할 만큼 아프니까 겨우 모기 소리만한 가녀린 신음을 낸 것이었다. 두고두고 내 기억에서 좀체 지워지지 않는 영상이다.

조국 교수와 오연호 이사가 진보집권플랜을 발간했대서 궁금했지만, 솔직히 책값이 아깝다. 진보는 과연 재집권할 수 있을까? 답은 명확하다. 진보는 다시는 집권할 수 없다. 나는 그들의 책을 읽지 않고도 당분간, 아니 오랫동안 진보는 집권하기 힘들다는 것을 안다. 그들이 어떤 집권플랜을 구상하든 현재의 그들이 보여주는 실망스런 모습에서는 진보집권의 희망의 싹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진보집권, 꿈 깨시오.” 왜냐고? 그들은 진보가 허구적 개념이라는 것을 애써 외면하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가 애매모호한 부의 대립물이며, 프롤레타리아는 보수적 사적 소유자의 파괴적 대립물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의 실질적 이데올로기는 민족주의도, 자유주의도 아닌 냉소주의와 가족 내지 의사(擬似)가족 단위의 이기주의의 조합이다. 극도로 부패한 관벌, 재벌의 지배 하에 사는 한국인들은, 일반적으로 사회가 거짓과 폭력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보면서 정부나 사회 지도층도, 서로 잘 믿으려 하지 않는다. (진보가 승리하려면) 학교 체벌 등 인권 문제부터 철거민 투쟁이나 비정규직 파업까지 약자들이 싸우는 현장마다 당의 명운을 걸고 총력 지원하며 평상시에도 약자들을 지원할 수 있는 풀뿌리 조직을 확충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다. 저항의 현장마다 진보정당의 깃발이 휘날리면 언젠가 한국에서도 진보정치가 빛을 보게 될 것이다.” 박노자는 아직도 뭘 모르고 있다.

과연 대한민국에서 진보라는 개념은 정당한가? 앙리−레비가 “뭐라고, 오늘날 프롤레타리아는 없어(le prolétariat, hélas,  n’existe toujours pas)!”라고 말하듯 진보란 보수라는 허구적 개념의 대립일 뿐이다. 댄디스트 외젠 쉬가 얼치기 개량주의자로 변신하듯 진보는 변신한 자본가의 다른 모습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진보라고 자칭하는 저들은 80년대의 운동권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진보는 박종철이나 이한열이란 새끼고양이가 군부 독재의 구둣발에 짓밟히고, 고통과 신음을 참아가며 이룬 민주화의 과실을 낭비했다. 동의대 사건 피의자가, 광주의 깡패가, 간첩이 민주화 보상금을 받아먹는 식으로 진보는 80년대 운동권이 물려준 유산을 탕진하고 말았다.

진보에게서 사라진 것은 자기성찰이고 남은 것은 타인을 향한 무조건의 인신공격이다. 김노 10권 집권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결코 아니다. 김노 10년 정권은 저들이 지금도 재생시키고 싶어하는 민주/반민주, 독재/반독재 구도가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그런 대립 구도를 수많은 기층 민중에게 인식시킨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숱한 사회과학 서적의 지적 바탕과 운동 선배들의 노고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저들이 간과했던 것은 반독재, 반민주 곳간이 영원한 화수분이 아니라는 것을 망각한 점이다. 이미 노무현 집권을 끝으로 그들의 곳간은 텅텅 비어버렸음에도 아직도 반민주, 반독재 구도가 먹힐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지금은 홈플러스로 바뀐 홈에버 월드컵점 앞에서 비정규직 아주머니들의 데모를 본 적이 있다. 계산대에서 얼굴을 마주치던 아주머니들은 절실했다. 앞에서 노조위원장이 북을 치고 멀찍이 경찰 살수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월드컵 공원의 적막을 깨는 살벌한 풍경과 소란이 불편해서 투덜거리며 불광천 쪽으로 비켜가려고 했다. 그때 가드레일에 기대어 청바지에 뱀 눈을 치켜 뜨고 담배를 꼬나 문 젊은 민노당(깃발 보고 알았다) 여성당원 하나가 온갖 쌍욕을 퍼붓고 있었다. 노동운동은 꼭 그렇게 해야 하나? 아내 보기가 민망했다. 돌아오는 길에도 여전히 아주머니들은 소리를 지르고 있었는데 민노총과 민노당원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상 시장 다음 가는 권한과 파워를 갖고 있으며, 상임위 의원한테 잘못 보이는 날이면 승진은 물론이고 해당 의원의 임기 동안 제대로 업무를 추진할 수도 없으며, 주택, 건설 분야 상임위 의원은 지역 사업자들도 무시하지 못한다는 어느 시의원의 폭행사건은 민노당원과 민노총원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내겐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이숙정의 폭행사건은 패션 좌파의 본질을 보여주는 사례일 뿐이다. “절대 때리거나 폭행한 적은 없다. 직원 20명 정도가 다 보고 있었고, 20:1로 도리어 나한테 유리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다른 직원들 앞에서 사과를 받았다.”며 반성하지 않고 억울하다는 수많은 이숙정들이 있는 한 자칭 진보의 집권은 허무한 망상에 불과하다.

진보가 집권하려면 니꼴라이 오스뜨로프스끼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의 빠벨 꼬르차긴이 보여주는 철두철미한 혁명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홀어머니와 형과 어렵게 살면서 끊임없는 말썽 때문에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역 구내 식당에 취직하여 가난한 노동자들이 금전적, 육체적 노동은 물론 성(性)적으로도 착취당하는 것을 보며 부르조아에 대한 반감을 키워나간다. 어린 나이에 열성당원으로 성장하여 내전과 1차 대전에 참가하여 포탄의 파편에 맞아 한쪽 눈이 실명되면서도 엄청난 의지와 인내력으로 극적으로 회생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여러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척추 손상으로 인한 통증으로 고생을 거듭하지만 진정한 혁명전사가 된다.

주인공 꼬르차긴은 절규한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 그것은 생명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단 한번만 주어진다. 따라서 인간은 그 삶을, 아무런 목표도 없이 살아온 세월 때문에 참을 수 없이 아프게 되지 않도록, 비굴하도록 소소한 과거 때문에 불길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지 않도록 살아야 하며, 죽음에 이르러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도록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나의 모든 사람과 모든 역량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즉 인간 해방을 위한 투쟁에 바쳐졌노라고.” 진보가 정말로 집권하고 싶으면 다른 집단을 무조건 매도하기 전에 자신들이 먼저 철저하게 성찰하고 반성해야 한다. 자신들의 독선과 과오를 욕설과 폭행으로 덮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기층민중 빠쁘가가 동료 끌림까에게 가르쳐 주는 정치는 이렇다. "낸들 아니! 사람들 말로는, 만일 누군가 짜르한테 반대하면 그게 바로 정치하는 거래." 끌림까는 너무 놀란 나머지 몸을 떤다. 누구라도 이 부분을 읽으면 끌림까처럼 전율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공산혁명의 동력은 끌림까라는 기층민중이 보여주는 단순함만이 아니다. 혁명을 위하여, 안존한 삶을 원하는 연인과 단호히 이별하고 철저히 제 몸을 부수는 꼬르차긴 류의 자기 희생 없이 진보는 절대로 집권할 수 없다. 타인의 인상을 놀리며 쥐그림을 그리는 비겁한 짓을 예술이라고 강변하며, 근거 없는 인신공격을 반독재라고 착각하는 치졸하기 짝이 없는 짓을 진보라고 우기는 한 진보집권은 없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진보 집권, 꿈 깨시오.”


덧글

  • ㅍㅎ 2011/02/08 12:16 # 삭제

    이중잣대와 남탓, 국개론, 음모론을 버리지않으면 말씀하신대로 진보는 답없습니다.
    그게 제일 통탄할 일이고요, 솔까 진보가 그것만 버리고 건실하고 정의로운 "진보"가 된다면 누가 그들을 조롱하고 외면하겠습니까?

    그러나......(후략)
    (한숨)
  • 2011/02/08 23:56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Mediocris 2011/02/12 08:16 #

    좋게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순신 2011/03/06 22:03 # 삭제

    책 쓰셔도 되겠어요
  • winbbs 2011/04/02 18:10 #

    솔직히 박노자 그 사람은 아직까지 진보가 집권 할 수 있다고 믿는 헛 희망을 품는 ML주의자에 다름 없는 사람입니다. 즉, 진보 팔아서 먹고 사는 러시안 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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